문정현 신부님 슬라이드-노순택 사진

“내 마지막 싸움…살아서 평택 떠날 생각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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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슬라이드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이문영 기자 , 2005-11-15 오후 2:08:33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이 사이에 물려 있던 울음이 새고 있었다.
울음은 목소리를 흔들었고, 물방울로 맺혀 눈가를 비집었다.
주민들의 현실이 아파, 그는 티 안 나게 울먹였다. “너무 아파 너무 아파”를 되풀이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37-8 번지, 미군부대(캠프 험프리) 옆집.
‘황새울’ 너른 들을 내다보며 하루를 열고 접는 그는, ‘동네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눈물을 글썽였다.
미대사관 앞 20여 시간 단식투쟁을 마치던 16일 오후엔, 단식을 말리는 주민들의 손을 붙잡고 슬프게, 슬프게, 흐느꼈다.

신부 문정현(66,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은 주민들의 고장난 콤바인을 염려했고, 마을 어른들의 나빠지는 건강을 걱정했다.
올 2월14일 ‘대추리민’이 되고부터 그는 눈물이 많아졌고, 싸움을 시작하고부터 “이럴 수가 없어”를 입에서 떼지 못했다.

“작살내라”란 경찰 고함소리에 대추리 들판이 ‘작살났던’ 7월10일, 그후 네 달이 지났고, 범국민평화대행진은 12월11일에 또다시 날을 잡았다. ‘예정된 충돌’을 대비하며, 문정현은 평택역 앞에서 12월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의 토지강제수용 방침에 항의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고, 그가 맞을 새벽의 횟수는 기한이 없다.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막힌 미대사관 앞에선, “이 자리에서 죽겠다”며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던젼다.

지팡이를 짚고 겨우겨우 걸으며, 신부는 ‘생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싸움의 정당성이 우리에게 있는 한 시간 문제다. 변화의 물결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깨지더라도 결국 이긴다.” ⓒ 허태주/코리아포커스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겠다”

“나이도 있고, 건강도 시원찮고…. 대추리가 내 운동의 마지막 장소가 될 거 같다.”

문정현의 언어는 스스로의 금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그에게 대추리는 ‘수없이 거쳐온 운동현장 중 하나’가 아니었다. ‘다음이 없는’ 단 하나의 싸움터였다. 미대사관 앞에 눕기 전 어느날, 그는 ‘죽음’을 말했었다. 대사관 앞에 누운 날, 그는 또 ‘죽음’을 입에 올렸다.

“땅을 빼앗기면 내 발로 걸어나갈 생각 없다. 절대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는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고 있다. 평택에서 살아나갈 마음 없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5개월, 그 안에 판가름난다. 이기고 지는 걸 떠나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고, 싸워야 하니까 싸우는 거다. 어떤 불이익이 있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후는 생각치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긴 시간 동안 싸웠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37-8 번지, 지난 2월 문 신부는 ‘대추리 공식 주민’이 됐다. ‘이번에도’ 그는 ‘함께 살고 함께 싸우기 위해’ 이사했다. ⓒ 허태주/코리아포커스  

그는 비장했고, 그야말로 비장했다. 평택 주민들의 긴장감은 7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난 8월31일로 협의매수가 종료됐지만, 정부는 매수에 실패한 120만평을 대상으로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수용재결신청을 한 상태다. 재결결정이 나면 강제철거도 ‘합법’이 된다. 문정현과 주민들은 ‘최후의 일전’에 임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매수종결 결정을 근거로 쫓아내겠다는 거다. 비인간적인 작태다. 그렇게 반대하는데도 그냥 밀고나가는 정부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 이거야 말로 새로운 독재정권 아닌가. 곧 강제철거가 들어올 거다. 유례 없는 충돌이 예상된다.”

“견딜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어떤 식으로건 다칠 수밖에 없는 주민들 걱정에 신부의 목소리는 또다시 잠겨들었다. 7월10일의 상처는 ‘데모 한번 해본 적 없는’ 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투쟁을 이끌고 있는 그의 마음 역시 어느 때보다 답답하다.

“주민들에겐 가혹한 시련이다. 운동하던 분들이 아니다. 그야말로 생업에만 종사하던 분들이다. 얼마나 약한 분들인가. 하루하루는 얼마나 두렵겠나. 나야 평생 ‘반미운동가’란 소리 들으며 살아왔지만…, 이 분들이 아파하는 걸 보면…. 땅을 빼앗기는 두려움에 노심초사하다 금년에만 10여명의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거대 권력 앞에 이 분들이 무슨 힘이 있나.”

미군기지 확장 저지 싸움을 시작한 후 평택의 마을과 논밭엔 주름이 잡혔다. 토지 매각을 놓고 마을 사람들 사이엔 가시가 돋았고, 공동체는 앙상하게 마르고 있다. 기쁨 슬픔 한솥에 나누던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리고 앉았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공권력이 사람 사이를 쪼개면 위화감은 골목골목을 뱀처럼 스멀거렸다. 빈집을 재빨리 정돈하는 것이 그나마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치유 방법이다.

큰 ‘대(大)’ 가을 ‘추(秋)’, 풍요의 땅 대추리가 울고 있다. ‘농사꾼의 지상낙원’에 근심이 그득했고, 들녘을 바라보는 신부의 눈엔 안타까움이 그득했다.

“평택에서만 285만평을 수용한다는 건데, 이게 보면 그냥 지평선이다. 285만평이란 땅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넓이가 아니다. 여기서 봐도 일부만 보인다. 누런 쌀을 물처럼 쏟아내는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 미군기지를 만든다니…. 농사 짓는 주민들 의견은 무시하고 국방부에서 내려보낸 쪽지 하나로 땅을 내놓으라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나로선 상상이 안된다.”  
  

“내 발로 걸어나가진 않는다. 대추리가 내 운동의 마지막 장소가 될 거다.” ⓒ 허태주/코리아포커스  

“멸치떼의 힘을 믿는다”

“우린 지금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문정현은 울고 있지만은 않았다. 땅을 지켜낼 것을 ‘무한한 희망’으로 의심치 않았다. 희망의 근원은 싸움의 정당성이었고, 바스라질 듯한 희망은 역설적으로 주민들을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었다. ‘7월보다 더한 12월’이 되겠지만, 그는 변화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안다”고 했다. 기지 확장이 한미간 합의사항이라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했다.

“우리한테 무슨 힘이 있나. 주민들한테도 솔직히 이야기한다. ‘우린 힘 없다’고. 하지만 ‘이 길이 옳은 길이므로 가자’고 한마디 더 한다. 그렇다. 우린 계속 지면서 이겨왔다. 소파 개정 투쟁이나 매향리 싸움에서도 우리는 다 망가졌다. 망가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효순·미선이 사고 때처럼 시청 앞을 가득 메울 수 있었다. 이제 임박했다고 본다. 싸움의 정당성이 우리에게 있는 한 시간 문제다. 변화의 물결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깨지더라도 결국 이긴다.”

이기기 위해, 문정현은 ‘멸치떼’를 모으고 있었다. 은빛 비늘 반짝여 변화의 물결을 일궈낼, 그 물결로 ‘항공모함’을 뒤흔들, 작은 멸치들을 떼로 불러내고 있었다. 1만2천여 멸치가 모였던 7월에 비해, 12월엔 5만의 멸치가 모일 거라 했다. 문정현 희망의 뿌리는 늘 힘없는 사람들이 쌓아올린 염원, 오직 그 마음이었다.

공권력이라는 ‘대포 한 방’에 기댄 정부는 사방에서 모여들 멸치들의 꿈틀거림을 당해낼 수 없을 거라,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힘’을 평생 체험하며 살았다”고 했고, “희생을 감수하는 만큼 변화도 크다”고 했다.

“푸르게 자라는 벼를 신경쓰느라 ‘집결’이 쉽지 않았던 7월10일과는 상황이 다르다. 추수가 끝난 12월엔 ‘너른 공간’이란 무기가 있다. 거기가 다 찰 거다. 일대 항쟁이 될 거다. 항쟁이나, 비폭력 항쟁이다. 부딪히면 우리 희생이 너무 크다. 공권력은 허한 거다.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공권력이 세게 나올수록 우리는 이긴다.”

평택, 특히 대추리 주민들에게 미군기지는 애초부터 ‘평화의 수호자’완 거리가 멀었다. 단지 배고픔을 달래주는 ‘초콜릿의 달콤함’이었고, ‘모멸감의 근원’이었다. 주민들은 어린시절 부대 하수구로 기어들어 미군들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자랐다. 쓰다 버린 연필을 주워 학용품으로 사용했고, 구리 철선 뭉텅이를 가져다 엿과 바꿨다.

더 나이 든 주민들은 미군 ‘하우스보이’가 돼 내부반을 청소했고, 군화를 닦으며 쌀을 벌었다. 그 미군기지가 몸집을 불리려 땅을 요구하는 지금, 주민들은 ‘그들이 지키겠다는 평화’를 믿지 않았다.

“군사력 강화로 얻는 평화가 평화인가. 더 큰 재앙이다. 미국의 움직임이 수상쩍다 싶으니까 러시아와 중국이 합동군사훈련을 하지 않나. 군사력과 군사력의 대결일 뿐이다. 총소리 없다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12월10일 범국민평화대행진은 일대 항쟁이 될 거다. 공권력이 세게 나올수록 우린 이긴다. 우린 지금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 허태주/코리아포커스  

‘바르톨로메오’란 세례명으로 사제서품을 받은 1966년 이후, 한반도의 가장 아픈 곳마다 문정현이 있었다. 짐을 싸들고 들어갔고, 그곳 주민이 됐으며, 함께 뒹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몸을 빼지 않았다. 오일이고 육일이고 길에서 잠을 잤고, 비를 철철 맞으며 단식했다. 거리에서 싸웠고, 거리에서 웃었으며, 거리에서 울었고, 거리에서 늙었다. 오직 ‘남는 자’가 되고자 했다.

“신부는 바닥에 처져 있어야 한다. 고통받는 데 내려갔으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함께 사는 것은 운동의 기본이다. ‘남는 자’가 되는 것이 내 평생의 사명이다.”

그는 지팡이 없인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허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 했다. 주민들과 술마신 다음날엔 속이 아파 괴로워했고, 국제연대 호소하러 유럽에 다녀온 후엔 심하게 앓았다.

그는 매일같이 심장약을 먹고 있었다. “이거 안 먹으면 못 견뎌”하며, 가슴에 품던 약이었다. 그 약을 미대사관 앞에서 집어 던졌다. 자신을 가로막은 경찰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던 모든 끈들을 놓았다.

좀 편하게 살 생각 없냐고 물었다. 그 물음은 또한 좀 편한 죽음을 맞고 싶지 않냐는 뜻이었다. 신부는 “그럼 방에 앉아서 천장만 보고 있을까?”하고 답했다. 답하고 덧붙였다.

“나는 괜찮다.”

신부는 스스로의 운명을 ‘회오리 피할 길 없는 나무 한 그루’라 표현했다. ‘회오리를 맞으며’ 매일 연 촛불집회가 벌써 사백서른번째를 넘어섰다. 촛불을 밝힐 때마다 그는 기도한다.

미군기지 확장계획이 원점에서 재검토 되기를, 상처받고 찢긴 마을 공동체가 치유되기를, 하루 빨리 촛불을 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가 앞의 문정현 신부는 자신의 운명을 ‘회오리 피할 길 없는 나무 한 그루’로 표현했다. ⓒ 허태주/코리아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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